백두대간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던 그 곳은 지금 소리 없이 하얀 겨울꽃이 피었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왔다. 눈 구경하기 힘든 겨울은 그럭저럭 지나간다. 뉴스에서는 신종 바이러스 소식이 삭막한 겨울을 뒤덮고 움츠려진 마음은 도시의 골목에서 건조한 바람으로 남는다. 그래도 제주도에는 유채꽃이 피고 복수초 노란 꽃망울이 피었단다.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배낭을 메고 눈부신 하얀 겨울 꽃을 찾아 떠났다.
아침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저기 올라가는 길 눈 좀 밟아 주소’ 빤히 보이는 산자락 신당으로 가는 길이 막혀 기도처에 이틀이나 오르지 못했다는 아주머니는 식당 난로 가에서 물을 따르며 헛헛하게 웃는다. 눈이 무릎까지 빠져 산길을 올라갈 엄두고 나지 않는단다. ‘눈 좀 밟아주고 신당에 장작불 때고 하룻밤 주무시고 가소’ 무릎까지 올라간 등산스패츠에 그깟 눈쯤이야~일부러 심설산행 러셀도 하러가는데..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산행 끝나 일찍 내려오면 길을 터주겠다’는 말을 하고 산길을 올랐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날은 눈 속에 파묻혀 걷다가 인적 없는 산길의 새소리에 끌려 시간보다 한참이나 지나 어둠속을 내려왔다. 마을은 눈 속에 묻히고 태백의 산골은 장독대마다 동그랗게 눈이 쌓였다.
구름이 만든 풍경
바람을 따라 안개와 구름이 몰려들며 가지마다 상고대를 이룬다. 상고대는 나무를 감싸 안고 있는 겹겹의 하얀 결정체로 물안개 많은 추운 강가나 1,000m이상의 고산에서 만날 수 있다. 겨울 안개와 지나가는 구름이 만들어내는 아주 비밀스러운 현상으로, 자연요건이 맞아야 생기는 상고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도 필요하다. 습한 기온은 백두대간을 넘으며 많은 눈을 내린다. 동해 바다와 접경한 대관령의 선자령과 고루포기산, 주목나무에 눈꽃을 피우는 태백산의 설경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눈꽃 산행지이다. 눈은 내려 다시 쌓여 눈꽃을 만들며 상고대와 만나 얼어붙었다. 나뭇가지는 솜뭉치처럼 뭉쳐진 눈이 침엽수의 푸른 잎을 덮어 얼음 덩어리로 남았다. 2월이면 산정상부의 상고대는 따뜻한 기온에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며 나뭇가지를 에워싸고 얼음의 결정체로 남으니 얼음꽃이 되어 버린다. 설화 만발한 장쾌한 능선은 포근한 낮의 기온으로 빙화의 터널을 만드니 하늘을 쳐다보면 나뭇가지 늘어진 얼음꽃 터널은 햇빛에 눈이 부시다.
그 속에는 나무의 꽃눈이나 잎눈에 마지막 겨울이 머물고 있다.
깊은 산골에는 봄을 기다리는 소리가 다가온다. 챙그렁 대며 바람에 흔들리며 눈밭으로 떨어지는 빙화. 바람이 불었던 능선에는 한 쪽으로 눈이 몰려 가슴까지 눈이 쌓였다. 껍질 벗겨진 사스레나무 고목들이 군락을 이룬 푹신한 눈밭에 잠시 누워 하늘을 보면 겨울 산행의 의미를 알게 된다. 바람 한 점 없는 오후의 산길에는 눈 쌓인 나무 등걸사이로 부지런히 오가는 동고비, 쇠박새, 곤줄박이 등 산새의 포르르 날갯짓 소리나 울음소리가 적막한 산길에 들린다. 산쑥부쟁이, 미역취, 구절초, 갈대와 단풍까지 어우러지던 산은 순백의 눈에 쌓여 설산이 되었다.
“겨울 산은 모든 무게를 덜어버린 사람만이 먼 길을 가게 열어준다”는 유응교 시인의 글이 있지만 눈 내린 겨울산은 그 자체만으로 가슴으로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먼 길을 갈 수 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산길에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로 걸음을 옮겨본다. 그런 눈길은 몸무게를 적당히 가늠하듯 부드럽게 내려 앉아 천천히 빠져드는데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안에서 느껴지는 아이스크림의 첫 감촉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또 다시 눈길을 걸으면 이젠 아무런 이야기도 미사여구도 필요 없으리라. 그 길에는 눈이 오다 그치고 다시 겹겹이 쌓이니 겨울산은 하얀 구름과 수평을 이루며 설원을 만들고 아름드리 나무군락에 하얀 성을 이룬다. 눈 내린 산사의 고요함속에 간혹 들리는 풍경소리와 처마 끝 옥수수자루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산골은 눈이 그치고 하얀 밤이 내려앉는다.
*눈이 오며 하얀 솜뭉치를 나뭇가지에 걸쳐 놓으니 눈꽃(설화雪花)이고, 안개와 구름은 나뭇가지에 차곡차곡 얼어붙어 상고대를 만든다. 상고대는 따뜻한 기온으로 낮에는 녹아 흐르다 밤에 얼어붙기를 반복하며 나무전체를 투명하게 에워 쌓으니 얼음꽃(빙화氷花)으로 남는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얼음꽃 속에는 나무의 꽃눈과 잎눈에 겨울이 머물며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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