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한탄강 물길 따라 꽃길 걷다 보면 역사의 시간도 그 길 위로 흐른다!
▲ 고석정 꽃밭의 버베나 동산
뜨거웠던 여름이 언제인가 싶다. 시원한 바람의 감각만으로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안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던 날, 강을 찾아 나섰다. 산과 들의 색깔이 서서히 빛의 커튼에 가라앉는 계절의 무게를 느끼는 최전방의 길 위에서, 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댑싸리와 코스모스, 은빛 억새가 서서히 낱알을 날리는 강가를 걸어도 본다. 강변을 걷는 걸음마다 바람이 스치고, 햇살이 반짝이는 물결 위에서 시간의 흐른다는 것을 문득 느낀다. 한탄강의 수백만 년의 지질학적 시간이 임진강을 만나 수천 년의 역사가 되어 두 물줄기는 가을꽃의 감성으로 흐르는 길목에서, 협곡과 강물 그리고 꽃과 역사가 서로 겹치는 공간을 느끼며 잠깐 멈추어 본다.
세월이 새겨진 삼곶리 돌무지와 댑싸리 향연
삼곶리는 연천군 북면 지역으로, 임진강 쪽으로 세 개의 큰 산부리가 뻗어 나와 예전에는 ‘삼고지' 또는 ‘삼꾸지'라 불렀다. 개맹골, 거북둔치, 괴미소, 꽁지등, 높은아리, 도장뫼 등 이 마을에는 재미있는 지역의 명칭이 수두룩하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은 백제 초기의 고대 무덤이다. 돌 하나, 하나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무지무덤 주변은 온통 댑싸리의 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임진강 둔치 광활한 잡초밭이 공원으로 변해 가을이면 연천을 떠올리는 명소로 바뀌었다. 사진을 찍으며 꽃과 강, 바람과 햇살이 만들어 내는 순간을 기록해 본다. 이곳의 꽃은 단순한 계절 장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을 잇는 시간의 매개체다. 강변 전체가 붉은 꽃물결로 뒤덮이는 시기, 바람에 흔들리는 댑싸리와 햇살이 만들어 내는 장면은 사진과 마음속 풍경이 동시에 기록되는 순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댑싸리의 물결은 시간을 천천히 쓸어내며 햇살이 스며든다. 연두색으로 시작한 댑싸리는 10월이면 붉은색으로 물들며 가을의 향연이 시작된다.
공존의 공간, 임진강 포구에서
▲ 호로고루 성
유유히 낮게 흐르는 임진강 변의 호로고루에 섰다. 비를 뿌리다 그친 강 건너로 기울어 가는 해가 붉은빛으로 비춘다. 그 빛은 오래된 성벽 위에도 내려앉아, 마치 수백 년 전의 시간까지 불러오는 듯하다. 호로고루 성곽은 고구려 초기 요새로, 임진강을 굽어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박 모양 언덕 위에 세운 옛 보루”라는 뜻을 지닌 호로고루는, 실제로 고구려가 한강 이북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 요새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천 년 전 선조들의 시선과 맞닿은 풍경에서, 역사와 계절이 겹치는 순간을 경험한다. 여름이 지나가는 길목에 해바라기꽃이 한창이더니 지금은 가을꽃이 수줍게 피어있다. 성곽에 올라 낮게 포물선을 그리며 흐르는 임진강의 물살을 내려다본다. 강물을 따라서 시선을 돌리면 고랑포구의 한적한 모래 둔치가 길게 이어지는 민통선 입구로 향한다.
▲ 고랑포구
고랑포구는 조선시대 물자를 운반하는 나룻배의 중심지였다. 1930년대에는 화신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최고의 무역항이었으며,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1968년 북한 공작원 김신조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북한 공작원 김신조와 그의 일행은 강을 따라 남하하며 남한 지역으로 침투했다. 고랑포구는 그들의 첫 발자취가 남은 곳으로, 한국 전쟁 이후 지속된 긴장과 안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되었다. 포구 주변에는 사건의 흔적과 안내판이 남아 있어, 자연 풍경 속에 역사적 기억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임진강은 단순한 강물이 아니다. 그것은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 그 자체다. 강 건너 모래와 초지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돌과 강, 햇살이 만들어 낸 장면은 가을의 정서를 전하는 한 폭의 풍경화 같다. 가을꽃은 그 흔적 위에 잠시 평화를 내려놓는다. 현무암 수직의 암벽으로 흐르는 강물과 햇살이 평화롭게 반짝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 역사와 계절이 공존하는 공간에 잠시 머물러본다.
연천의 고대산을 사이로 철원의 한탄강이 있다. 한탄강은 포천을 지나 연천에서 임진강과 만난다. 한탄강 협곡은 멀리서 바라볼 때 이미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수천만 년 전 화산이 남긴 흔적이 수직의 절벽으로 드러나 있었고, 그 아래로 강물은 검푸른 빛을 띠며 흐르고 있었다. 협곡은 마치 거대한 고서(古書)의 책장 같다. 한 장, 한 장마다 지구의 역사가 새겨져 있고, 강물은 그 페이지 위를 천천히 훑어 내려가고 있다. 철원 한탄강 고석정은 화강암 고석과 현무암 용암대지가 어우러진 지질학적 명소다. 강물의 침식으로 형성된 주상절리 협곡은 수백만 년의 지구 역사를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곳에 가을이면 ’고석정꽃밭‘이 화려하게 문을 연다. 협곡 위 드넓은 꽃밭이 가을바람에 시공간을 초월한 감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꽃은 단순한 계절의 장식이 아니라 돌과 강물, 협곡이 기록한 지질학적 시간 위에서 여행자가 느끼는 사색과 감성을 담아낸다. 강과 꽃, 역사와 지질, 시간과 감성이 서로 맞닿는 가을 여행의 완성이다. 자연 속에서 흘러가는 물결과 계절의 색채를 느끼며, 오늘의 순간 속에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풍경을 마음에 담아본다. 계절은 자연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반추하는 거울이라는데, 나는 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반짝이는 강물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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